홍.순.관., 연민으로 동시대를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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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3 08:13

작성자 : 별밭

홍.순.관., 연민으로 동시대를 노래하다

            
    
        
                 
                     

- [302호 레드레터 크리스천] 장현호가 묻고 홍순관이 말하는 노래 이야기

                                                                                                 
  
▲ ⓒ복음과상황 이범진

우리 사회의 아픈 곳엔 언제나 노래하는 이들이 있다. (교회는 없었어도) 노래 없는 ‘촛불 현장’은 없었다. 조명이 없고 마이크가 없고 심지어 “리어카 위에서 메가폰으로 노래하는” 무대여도 노래하는 그들이 있다. 그 노랫말과 가락이 세상에서 먼지마냥 여겨지는 아픈 장소들을 비극이 아닌 희망의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고, 무심코 지나던 이들에게도 잠시나마 평화를 생각할 겨를을 주는 건 아닐까?
문득, 우리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노래쟁이들의 삶을 너무 모른다 싶었다. 예술가들이 ‘굶어 죽을 만큼’ 살기 어려운 우리 사회에서, 더 굶기 좋은 곳만 골라서 노래를 하는 그들의 삶 또한 ‘레드레터’(예수님 말씀을 따로 표시한 성경의 붉은 글씨)에 순종하는 삶 아닐까 생각했다. 곧 청춘을 다 바쳐 대추리-용산참사현장-강정마을-팽목항-광화문광장-필리핀빈민촌-베트남학살현장-오키나와미군기지 등 아픔의 현장에서 30년을 줄곧 평화를 노래해온 홍순관(53) 씨와, ‘길가는밴드’(길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무대 삼아 노래하는 장현호(37) 씨를 함께 떠올렸다. 15년 여의 터울을 두고 다른 듯 같은 길을 걷는 그들을 12월 초 목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이제, ‘장현호가 묻고 홍순관이 말하는 노래·삶·신앙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자.

― 사람들이 홍순관이라는 이름 앞에 붙이는 평화 수식어가 꽤 있다. 정작 선생님 스스로는 그 수식어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궁금하다.
많은 분들이 나를 평화운동가 이미지로 떠올려주신다. 진심으로 고맙지만 상처이기도 하다. 가수로 각인되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니까. 사회를 보다가 노래를 하면 “이 사람 노래도 잘 하네~”라는 말을 들은 적이 많다. 30년 동안 쭉 노래한 사람으로서 상당히 서운한데, 일종의 양가감정이다. 히트곡을 내겠다든가 대중에 이름 알리는 활동을 안해서인 거 같다. 어떤 면에서는 가수로서 자세가 안 되어 있던 거지. 이건 아내가 잘 안다.(웃음) 노래를 더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부쩍 든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전통이 오래된 〈열린음악회〉를 비롯하여 공중파 방송 출연 섭외도 거절해왔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노래) 이야기가 알려진 게 정말 없다. 대중 채널은 왜 그리 거절해왔나?
왜인지는 딱히 잘 모르겠지만, 폼 잡고 싶지 않았다. 30년을 아픔의 현장에서 노래하면서, 정치·경제·종교·문화·환경을 막론하고 사회를 보지 않은 무대가 없다. 대통령부터 청소부아저씨까지도 만나보았다. 자랑이 아니라 내가 사회를 잘 본다. ‘사회(MC)’주의자라서.(웃음) 가수로 출세할 길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런데 공중파 무대는 다 거절했다. 정신대 할머니들을 위한 노래를 부를 당시엔 어느 의류회사에서 광고모델 제안이 온 적도 있다. 통장 잔고가 20만 원도 안 될 땐데, 개런티 천만 원을 제시하더라. 1990년도에 천만 원이면 정말 큰 돈이다. 정신대 할머니들를 주제로 노래를 좀 불렀다고…, 차마 못하겠더라. 왜 돈 되는 일은 안 하냐는 질문도 꽤 들었지만, 그래서 아직 이 모양으로 사는가보다. 장점은 아닌 것 같다.

― 개인적으로 첨바왐바(Chumbawamba)라는 영국 밴드를 좋아한다.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도 큰 무대에서 파격 공연도 하고, 워낙 유명해서 GM 같은 회사 광고도 찍었다. GM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들을 위해 그 수익을 쓰기도 했다. 그런 방식은 생각해보지 않으셨는지.
중국 작가 노신이 “혈관에서 피가 나오고 분수에서 물이 나온다”라고 했다. 평소 삶이 뜻과 일치하느냐는 의미다. 나는 그런 노래 길을 간다. 지금 여기 예수가 온다면 뭔가 유명해지고 빅히트를 쳐서 효과적으로 업적을 쌓을까?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하기에 그늘에서 노래한다. 그래도 나는 간혹 인터뷰도 하고 무대에도 서지만, 예수는 나랑은 비교도 안 될 그늘로 들어갔을 거다.

― 자신이 부르는 노래와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말인가?
자본주의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지를 노래하면서 자본주의 구조 속에 들어갈 수가 없더라. 그건 너무 아픈 일이다. 예전에 MBC 예능 〈느낌표〉에 매주 좋은 책 한 권을 권하는 코너가 있었다. 권정생 선생 딱 한 분만 출연을 거절했다고 안다. 독자들이 서점에 가서 자발적으로 책을 고를 자유를 뺏는 행위라고. 그 얘길 듣고 깜짝 놀랐고, 진짜 성자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선정 책 저자는 곧 재벌이 된다. 한 사람 영웅 되고 땡 잡는 거다. 이런 걸 넘어서자고 노래하는 건데, 유명해져서 뭔가 기회를 잡겠다는 의식 구조는 천박하다. 아무리 죽었으면 싶은 나쁜 놈이 있어도, 단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이 생길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사형제를 반대하는 맥락과 같다. 섣부른 영웅 만들기, 섣부른 칭찬도 다 위험하다. 홍순관이 마치 ‘평화를 노래하는 대표’처럼 말해지는 것도 다 위험하다. 어디를 가도 내가 그곳에 가기도 전부터 이름도 없이 평화를 일구고 살아가는 다양한 분들이 있다.

― 집이 노후되어 샤워장 바닥에 물이 새는 바람에 아래층 주민이 나에게 해결을 요청한 적이 있다. 수리 견적 문의를 했더니, 한 분은 80만 원 정도 든다며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고, 다른 한 분은 보일러 배관 전체가 노후했다며 비용 2000만 원, 공사 기간 2주를 제시했다. 마지막 분은 부분적으로 설명을 다 해주고, 당장 필요한 공사만 제시했다. 물론 근본부터 뜯어 고치고 싶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건 세 번째였다. 훨씬 적은 비용으로 이틀에 끝났다. 지금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도 그런 사람 아닐까. 선생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다.
앞서 천박하다는 말을 했는데, 위험한 말일 수도 있겠다. 어떻든 나름 다 진심이니까. 그런데 ‘나름 진심’이라는 말이 참 복잡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탄핵 소추됐을 당시에 탄핵반대 촛불집회에서 월~금요일 공연하는 가수와, 토요일 가수가 따로 있었다. 뉴스는 토요일 가수를 다루면서 상당히 ‘사회적으로 의식이 있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러니 토요일 가수는 무대기획자에게 청탁을 하고 무대에 섰다. 그들도 나름 진심으로 무대에 섰을 것이다.  ‘나니까 이런 무대 선다’ 싶었겠지만, 내 생각엔 결국은 그들이 욕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NGO와 20년 넘게 일을 하는데, 책임자들에게서 평화 자체보다는 ‘평화에 대한 일’에 더 관심과 시간을 쏟는 모습을 꽤 본다. 일종의 밥그릇 싸움 같은. 그러다 진짜 평화로 가는 길을 잊는다. 세월호 예를 들면, 진상규명이 목적인데 자칫 문화제 포함 시위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다. 착한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이름 내기가 목적이 되고, 거기 중독되면 어느새 진짜 목적은 잃어버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 구분이 미묘한데, 체제의 함정에 빠지는 거다. 그분이 위에서 보시기엔 코미디일 거다.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스스로 ‘노래보다 언어가 앞서는’ 가수라고도 하셨다. 저도 노랫말을 가장 중요시하는데,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가수보다 평화활동가로 떠올려지는 점도 그와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
맞다. 나는 노래보다 언어고, 언어보다 침묵이다. 노자가 안 싸우고 이기는 게 최고라고 했듯, 입을 다무는 게 가장 좋다. 다만, 라이브 공연에서는 존 케이지처럼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연주가 될 수 있지만 음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백 있는 노래를 담고, 말도 한다. 지금까지 활동했던 시 노래든 동요든 노랫말에 핵심이 있다. 언어는 문화의 총체니까. 그런데 지금 한류라 부르면서 정부 지원까지 하는 케이팝을 보면 그 가사는 99.9%가 문학성도 예술성도 없다. 종교계 교육계 학부모계 등에서 케이팝 가사를 정독해봐야 한다. 유치원 공연에 가보면 어린아이들이 케이팝에 맞춰 춤추는 걸 놓고 엄마들이 미친 듯이 사진 찍으며 잘한다고 난리다. 그 가사가 얼마나 민망스러운 내용들이 많은데….

내가 동요를 부르고, 유치원 공연도 하는 맥락은 우리 언어로 우리 역사와 우리 감성을 이야기하겠다는 마음에 있다. 그러니 노랫말이 영순위고 그 다음이 가락이다. 노랫말은 정말로 중요하다. 그리고 아무리 사회적 가치를 담고 있더라도, 노래로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해도, 노래 전체의 작품성 예술성이 떨어지면 안 된다. 그야말로 시로서 음악으로서 듣는 이를 감동시킬 수 있지, 강요하는 게 아니니까.

― 이렇게 일대일로 만나 이야기 나누기 전에는 선생님에 대해 잘 몰랐다. 공연을 보고, 노래(말)들을 듣고, 최근 출간한 책 《나는 내 숨을 쉰다》(꽃자리)도 읽으면서 ‘위로’라는 수식어로 홍순관을 떠올렸다. 사람들을 위로한다는 의미이면서, 하늘의 마음으로 노래한다는 두 의미로.
25년 지기도 내가 책에 쓴 내 삶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는데, 우리가 다 그렇지 않나.(웃음) 위로라는 표현이 참 재밌다. 잘 봐줘서 고맙다. 실제로 줄곧 위로 경험이다. 자살 직전, 사업 망한 사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 내 노래가 듣고 싶다는 연락들이 온다. 아프고부터 내내 내 음악을 들어왔다는, 쫄딱 망한 사학재벌의 사택에 불려간 적이 있다. 망하기 전에 날 찾았으면 돈 벌어서 평화박물관 일도 쭉쭉 진행됐을 텐데. 우스갯소리지만 이게 돈을 절대 못 버는 거다. 우리 아들 살아났으니까 도와주겠다는 경우도 없고.(웃음)

― 정신대 할머니 돕기 모금공연 이야기를 좀 듣고 싶다. 공연을 여러 번 한 후에 이사야 말씀을 보면서 〈대지의 눈물〉을 만드셨다.
1995년부터 정신대를 주제로 10년 동안 150번 넘게 공연했다. 머릿속에 여전히 뚜렷이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일본에 강제징용 당한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일본의 가와사키교회에서 할머니들을 위한 공연을 했을 때였는데, 체구 작은 할머니 한 분이 내 허리를 감싸 안고 무언가를 계속 속삭이셨다. 한국말도 일본어도 서툰 할머니가 계속 하는 말이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였다. 한참을 붙들고 안 놓으시더라. ‘노래가 위로가 된다’는 말을 체험했다. 다른 공연에서도 그렇다. 그러니 위로가 된다면 어디든 노래하겠다는 마음이다. 정신대 공연을 아흔 번 하고서야 만들 수 있었던 노래가 〈대지의 눈물〉인데, 그 아픈 사건을 노래로 만들면서 사실적으로 다룰 수도, 풍자로 다룰 수도, 은유로 할 수도, 선뜻 희망을 말할 수도 없지 않나. 우연히 읽던 이사야서 말씀이 바람처럼 노랫말을 데려다주었다. 대지란 문학적으로 어머니이자 이 땅의 눈물, 또한 흙으로 지어진 인간을 뜻한다. 그 눈물을 노래했다. 공연 이름이 노래 제목이 됐다.

― 정신대 공연에 이어 세계 각지를 돌며 평화박물관건립 모금공연을 해온 이야기가 궁금하다. 어려움도 많았을 것 같다.
한국 전쟁의 비극과 평화에 대해 배울 공간이 없다. 한국은 입양아를 제일 많이 해외로 보내는데, 정작 그런 입양아들을 품어주는 기관은 또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입양아들이 돌아오면 어디서 우리의 평화와 바른 역사를 찾아볼 수 있을까. 그래서 평화박물관을 만들고 싶다. 또 한 가지 이유는 정신대 공연을 하면서 정신대 문제를 다루는 활동가들의 얼굴을 보면서였다. 많은 NGO 단체 사람들이 그렇지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얼굴에 그늘이 너무 많은 게 마음이 아파서라도 평화박물관을 짓고 싶었다. 평화로 가는 길이 품도 돈도 많이 드니까 실제로 힘들다. 지금 평화의 격전지인 광화문 광장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내 스승이자 구주이신 예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났으리라는 상상력을 놓을 수가 없는 게 평화박물관을 짓는 마음이다. 찌들다가도 한 번 웃으면 해 같이 빛났을 그런 평화를 건져내고 싶어서 평화박물관을 만들려 한다. 자라나는 아이들, 돌아올 입양아들이 한국 역사를 바로 알고 평화를 알도록.

                                                                                                 
  
 

― 100억 원을 모금 중인데, 어느 정도 이뤄졌는지.
정말로 잘 짓고 싶은 생각에 ‘100억’ 모금을 하고 있다. 어설프게 달려들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전문 소양을 갖추면서도 소명감이 자라도록 사람을 키워내고 싶다. 돈이 많이 들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30억 모이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미와 아프리카 빼고는 다 다녔는데, 운동권 친구들은 (평화박물관 모금에) 미국 가는 거나 교회 순회를 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난 전쟁 책임이 있는 나라들에서 역사를 이야기하고 모금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였고, 어디든 동포사회의 90퍼센트가 교회 네트워크다.

― 한국교회도 그렇지만 미국의 한인교회는 더 반공적 분위기에 ‘보수’적일 것 같은데…. 모금 공연이 어렵지 않았나?
첫 방문지였던 애틀란타의 제일 큰 한인교회에서는 달랑 9명 앞에서 노래했다. 1만 명 가까운 교인이 들어가는 공간에서, 최고의 공연 장비를 놓고서. 샌프란시스코의 교회에서는 마이크도 없이 13명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이런 경험 숱하다. 교회와 교인들이 아픈 현실의 문제에 관심이 없어서 그렇다. 현호 씨가 그 넓은 공간에서 아홉 명 앉혀 놓고, 최고 장비로 노래하면 어떻겠나? 그것도 9명 중에 두 명이 교회 관계자여서 계속 왔다갔다 사람 모으러 움직이는 상황에서. 홍보를 많이 했는데도 그랬다. 대한민국의 어떤 가수가 이런 경험을 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해외 순방’ 다니면서 꽤나 고급지게 노래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20년 동안 해외 공연하면서 단 한 번 빼고는 모두 자비로 다녀왔다. 트렁크 하나는 내 짐, 다른 하나는 판매할 음반 CD였다. 음반 수익은 수입이 아니고 항공료였다. 아무리 CD가 많이 팔려도 딱 왕복 항공료! 미국은 200개 가져가서 다 팔아야 항공료가 나온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금액이고. 정말 개미처럼 팔았다. 이런 게 산전수전 아닐까.

― 과거에 ‘경배와찬양’ 사역을 몇 년간 한 적이 있다. 미주, 중국, 캐나다까지 투어를 돌 땐 초청 교회 후원으로 경비를 채울 수 있었다. 그쪽에 몸담다가 지금은 선생님과 비슷한 현장 노래꾼 입장에서 선생님 말씀을 들으니 굉장히 씁쓸하고 참혹하다. 솔직히 그런 현실이었는지 몰랐다.
내가 공연하는 미국 교회 중에도 그런 찬양 사역팀이 왔다 간 곳도 있었다. 목사님들은 자랑처럼 누가 다녀갔고 무슨 대접을 어떻게 했다는 말을 잔뜩 늘어놓고는, 내가 한 시간 공연하고 나면 100불을 줬다. 정신대 모금공연을 하고, 평화공연을 하는 가수는 가수 취급은커녕 돈도 제대로 안줬다. 그 설움은 아내한테도 말 다 안했다. 그렇게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앞서 말한 산전수전이란 말이 그리 간단한 단어가 아니다. 자비로 공연 간 건 자랑이 아니다. 모금은 해야 하는데, 안 불러주니까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땐 순진하게도 노래하면 감동받아서 돈이 모일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 100불도 받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정말 짜다. 제일 많이 받은 교회 공연이 400불이다. 한마디로 거지 취급이다. 힘든 곳에서만 공연을 하니 집에 가져가는 돈이 없어서 마음이 참 힘들더라.

이제는 나이 들면서 예전엔 자존심 상하던 일들이 부끄럽지 않아졌다. 공연 초대를 하면 돈이 있을 만한 곳엔 달라고도 하고, 숙소 제대로 안 잡아주면 멀리 안 간다. 순회공연을 다니면서 미국 전역의 싸구려 ‘장’에서 다 자봤는데 이젠 진짜 못 자겠다. LA 8번가의 어느 여관은 한국에서 사기 친 사람, 도망 중인 사람들을 비롯해서 범죄자 소굴이다.(웃음) 온갖 욕 퍼붓는 소리를 들으며 잠을 자고 나서, 다음날 (거룩한) 교회에서 공연 한번 해보라. 그나마 장도 안 줄 땐 기독교단체 사무실 바닥에서도 잤다. 트렁크 끌고 기타 매고, 게다가 옆에 욕할 사람도 없었다. 정말로 고독하고 외로웠다. 위선 떨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서울 용산참사 현장에서 그 어려운 상황에 가수 왔다고 스티로폼 네 단을 깔아 만들어준 무대가 얼마나, 얼마나 고마운 무대였는지 모른다. 가수 취급, 사람 존중해준 거니까. 정말 최고의 무대였다.

                                                                                                 
  
▲ 용산 참사 현장에서 '평화와 비폭력을 위한 세계 행진' 진행 당시. (사진: 홍순관 제공)

―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어떻게 노래의 예술성을 지켜 나가시는 건가.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안 서본 무대가 없다. 탑골공원 앞에서 리어카 위에 올라 메가폰을 잡고 〈4월〉을 부른 적도 있다. 그 서정적인 노래를 부르는데, 팬티 하나 걸친 채 학생들 앞에서 강의하는 기분이었다. 눈을 어디다 두고 마음을 어디다 둘지 모르겠는 그런 상황…. 가끔씩 큰 공연장에서 공연도 하는 이유가 질문의 대답이 될 것 같다. 미국 링컨센터나, 대학로 아르코극장 같은. 링컨센터 공연 때는 기획부터 표 팔고 포스터 붙이는 것까지 정말 바닥을 기어가면서 한 힘든 경험이었다. 이 주제로 간증집회 하면 모금이 꽤 될 거다.(웃음) 아르코 극장은 무용·연극 전용극장인데, 내가 평화박물관 모금을 한다니까 극장장이 나서서 다원문화(미술·연극·음악·무용 등의 장르를 융합한 문화)로 만들어 선정하겠다고 했다. 극장 측에서 기획서를 꾸려 다원예술을 했는데, 영상미술도 그렇고, 돈 안들이고 멋있게 보이는 것도 내 장기니까 할 수 있었다. 여성운동가들을 대상으로 한 공연에 내가 총연출을 맡고, 해금, 재즈, 댄서와 함께 〈또 다른 숲을 시작하세요〉라는 공연의 스타트를 끊었다. 여성운동가들이면 그래도 우리나라에서 공부 많이 한 분들인데 이런 공연이 처음이라고 해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공연의 수준은 그 사회의 문화 수준과 함께 가는 법이다. 공연하는 사람도 좋은 공연을 해야 수준이 올라가고 제대로 된 공연을 봐야 관객의 수준도 올라간다. 그러니 어떤 공연도 노래도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성이 빠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 ‘수학여행 갔다가 사고 난 애들 일을 두고 왜 난리를 치느냐’는 식의 사고방식인 사람들을 광화문의 공연으로 설득할 수 있는 거다. 사실 세월호 참사 후 관련 노래가 너무 빠르게 올라오는 걸 보면 우려가 된다.

― 어떤 우려를 말하는 것인가.
정신대와 마찬가지로, 세월호 참사는 기막히게 참혹한 사건이다. 아직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엇을 위로하고 기억하자는 것인지가 불분명한 노래가 너무 빠르게들 나오는 것 같다.

― 진상이 밝혀지기 전까지 필요한 노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저 역시, 개나리가 봄에 반복해서 피는 것처럼 노란 리본을 통해서 우리 시대에 어떻든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이들을 기억하자는 세월호 노래를 만들었다.
현호 씨 말대로 분명 과정에서도 필요한 노래가 있다. 내 이야기가 원론적인 이야기라서 미안하다. 그런데 기억의 대상에 대해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나는 “어떻든 억울한 죽음”이라는 지점에서 동의할 수가 없다. 자칫 기억 자체가 목적이 되고, 어떤 억울함인지가 흐려진다. 죽은 아이들이 아니라 차라리 ‘이런 대통령을 잊지 마세요’ ‘이런 정부가 있었답니다’ ‘우리나라 정치사에 이런 대통령이 있다’라는 노랫말이어야 하지 않을까? 죽음과 슬픔 자체가 아니라 죽음의 책임이 기억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대 문제를 놓고도 마찬가지다. 곡을 쓰는 착한 마음이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오래 하다보면 진실은 슬그머니 감춰질 수도 있는 점이 위험하고, 더 정교해야 한다는 의미다. 베트남 이야기를 좀 하자면, 베트남은 입구에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진 마을들이 있다. 한국군이 베트남전 참전 당시 벌인 참극을 현장에서 확인하면, 어떤 것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다. 지금도 베트남에서는 그 일들을 자손만대에 알린다. 베트남은 집집마다 자장가 가사를 엄마가 직접 짓는 문화인데, 그 가사가 거의 한국군 증오에 대한 내용이다. 그들은 엄마에게 처음 듣는 모국어로 그 참상을 기억한다.

― 정말 철두철미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엔 좀 다른 질문을 드리고 싶은데, 가난에 대해서도 이야기 나누고 싶다. 벌이가 어떠신지….
밥을 진짜로 굶은 적은 없다.(웃음) 사실 내 활동 무대가 시민단체, 학교, 관공서인데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 NGO에 대한 정부 보조금이 거의 끊기다시피 하지 않았나. YTN 해직기자 공연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의 첫 공연이었는데, 그 뒤로 하나도 안 들어왔다. 현 정권은 말할 나위도 없고. 단체 송년파티도 못하는데 무슨 공연이겠나.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 희생 추모를 위해 ‘250개의 책가방 모으기’ 퍼포먼스가 있던 날, 그 가방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주최 측에서 교통비를 건네주는데 돌려줬다. 그 돈을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나. 돌아가는 길에 스치듯 ‘그 돈이라도 내가 교통비를 했어야 했나’ 싶었는데, 이런 생각 자체가 참혹했다. 그래도 밴드에 비하면 나는 사치다. 내가 더 묻고 싶다. 현호 씨는 밴드 활동을 하는데, 요즘 밴드가 어떻게 밥을 먹고 사는지.

― 다른 직업을 갖고 있는 멤버도 있고, 여러 밴드를 겸하여 활동하는 멤버도 있다.
밴드로는 벌이가 안 된다는 말인가. 이런 주제에 대해서는 같이 공연을 해도 서로를 깊이 모르면 잘 모른다. 도대체 돈을 받고 이 무대에 서는지 아니면 그냥 돌아가는지 모른다. 서글픈 현실이다. 우리 같은 가수들이 지금 서울의 어느 집회에서 노래하고 돈을 받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데 지방에서는 광화문에서 노래 부르고 그러면 메인이라고 생각해서 꽤 유명하고 돈도 꽤 버는 걸로 오해한다.(웃음)

                                                                                                 
  
▲ ⓒ복음과상황 이범진

― 그런 현실에서 노래하는 가수에게 조언해주신다면?
‘선수’끼리 무대에서 관객을 휘어잡는 노래 게임을 한다면 자신 있나? 그 자신이 있어야 한다. 어떤 대단한 사람이 무대에 올라도 내가 훨씬 관객들을 잘 설득할 노래를 할 자신. 그래야 이런 참혹함과 비참한 상황이 넘어가진다. 그런 자신감 없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할 수가 없다. 90년대에 김성녀, 김영임, 임준철, 안치환 씨와 같은 무대에 섰다. 돈도 많이 벌고 대단한 사람들이었지만, 그날 앵콜 받은 사람은 나뿐이었다. 가수는 무대 연기력도 중요하다. 절대 ‘그냥’ 해서는 안 된다. 어떤 허접한 상황과 무대든지, 가수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니면 허접한 상황은 허접한 공연으로 끝나 버린다. 평소에 ‘어버이당’ 같은 분들 중에 딱 한 분만 내 노래를 듣고 마음이 바뀌었으면 하는 심정으로 노래한다. 그래서 가사가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 이건 승부다.

― 어머니에게도 공짜 티켓을 안 주실 정도로 ‘공연 티켓은 판매한다’는 원칙이 분명하시다.
우리나라는 아직, ‘공연은 당연히 돈 주고 보는 것’이라는 의식 수준에까지 이르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 악착같이 티켓을 판다. 안 그러면 가수로 안 볼 정도로. 돈 내고 볼 공연을 하겠다는 생각인데, 일종의 내 마지막 보루다. 나는 ‘현직’ 가수라는 의미다. 감독도 코치 아니고, 현직이라는 의미. 지인은 물론이고, 악착 같이 엄마한테도 팔았다. 내가 엄마라면 “에라, 이 자식아” 할 텐데 우리 어머니는 사주시더라. 어머니 마음인 거지…. 나도 나이 들어가면서 좀 둥글둥글해지긴 한다. 마침 1월에 새 앨범 작업이 끝나는데, 잘 나갔으면 좋겠다.(웃음) 그동안 노래를 해오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종합예술을 해왔지만, 작곡만큼은 집중적으로 하지 않았었다. 작곡가들이 주위에 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 곡을 지으면서 진작 하지 않은 걸 후회했다.

― 마지막 질문인데, 선생님이 노래를 하는 원천은 무엇인가.
이런 말 하면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연민이다. 정말 마음이 아프고 답답해서, 불쌍해서 노래한다. 아픔을 당하신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실은 이명박, 박근혜 씨도 내 노래가 듣고 싶다고만 하면 불러주고 싶다. 분명 비판받아야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불쌍하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사실 체제나 구조, 보이지 않는 것들이지, 그 개인들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분노다. 두 사람은 분노마저 마른 우리 시대에 분노를 알려준 ‘업적’이 있다. 나는 연민과 분노로 노래한다. 젊은 시절에 어떤 선생님이 낮엔 사람과 사물이 다 구분되는데, 해 지고 어두워지면 구분이 되지 않는 그런 게 바로 자비라고 했다. 난 ‘이게 바로 연민이구나’ 싶었다. 기독교에 연민이 없다면 그건 거짓이라고 생각한다. 노래도 그렇다. 

진행 장현호 길가는밴드
정리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오지은 기자 ohjieun317@gosco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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