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숨을 쉰다> : 강남순 교수의 서평(TCU 및 Brite Divinity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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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8 11:18

작성자 : 별밭

< 나는 내 숨을 쉰다> -- 내가 만난 어떤 책, 그리고 노래 이야기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강남순 교수


평화를 향한 생명-사랑의 노래신학 : <나는 내 숨을 쉰다> 속의 시선과 만나다


1. 시선에 관하여

한 사람 속에 수천의 층이 있듯이 한 권의 책은 저자의 내면세계의 무수한 층들을 담고 있다. 홍순관의 <나는 내 숨을 쉰다> 를 읽으면서 나는 이 책에 담긴 저자 홍순관의 시선들을 곳곳에서 보기 시작하였다. 나의 이 글은 이 책을 통하여 내가 만나게 된 홍순관의 ‘시선 (gaze)’에 대한 글이다. 한 사람의 시선은 그 사람이 생각하고 꿈꾸는 세계, 타자에 대한 이해, 보다 나은 삶에 대한 열정, 그리고 신에 대한 이해를 담아낸다고 나는 본다. 나는 사람이 각기 지니고 있는 그 시선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시선이란 쓰여진 언어나 말해지는 언어체계를 넘어서서 그 사람의 이 세계 안에서의 존재방식의 무수한 ‘다층적 결’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글과 말로 아무리 사랑, 정의, 평화, 또는 타자들과의 상호연관성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타자와 이 세계를 바라보는 그 시선에 그러한 가치들이 녹아있지 않은 경우 그 사람이 강조하는 그 중요한 가치들의 강조는 종종 공허한 메아리로만 남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처음 사람들을 만날 때에 늘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 중의 하나가 그 사람의 시선이다. 타자를 보는 시선, 바로 곁에 있는 이들을 보는 시선, 먼 타자를 보는 시선,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이들을 보는 시선—그 시선에서 따스한 연민이 느껴지지 않으면, 아무리 정의를 외치고 인권을 외치는 이들이라도 감동을 전하지 못한다. <나는 내 숨을 쉰다> 가 담고 있는 홍순관의 시선을 통해서 내가 다시 확인하게 되는 점이다. 내가 이 책에서 만난 시선과 목소리들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이해하는 제도화된 종교의 울타리 너머에서 존재한다. 그러한 제도적 울타리 너머에서 그가 그의 시와 목소리를 통해서 보여주는 것은 제도화된 종교가 아니라, 생명사랑과 연민의 종교의 모습이다.


2. 정의에의 예민성

예수가 지닌 독특한 시선은 언제나 ‘중심부’만이 아니라 ‘주변부’를 본다는 것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키 작고, 온전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삭게오, 군중들로부터 동떨어져서 나무 꼭대기에 올라간 삭게오를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다. 그런데 예수만이 그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non-being)’로 살아가는 삭게오를 본다. 그 예수의 따스한 시선에서 비로소 삭게오는 자신의 삶에 전적인 변혁의 주체가 된다. 삭게오를 자신의 삶의 변혁의 주체자로 만든 것은 예수의 설교도 아니고 강연도 아니고 더더군다나 회개하라는 질책도 아니었다. 예수가 한 것은 무엇보다도 따스한 포용의 시선으로 삭게오를 바라본 것이다. 그리고 삭게오의 집에 머물겠다고 함으로서 삭게오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고 고귀한 인간으로 대한다. 공적인 공간에서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삭게오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주는 첫 경험이었을 것이며,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는 삭게오를 한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이라는 평등과 정의에의 요구였을 것이다. 그 예수의 따스한 시선이 바로 삭게오를 새로운 존재로 변하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삭게오를 보는 예수-- 바로 홍순관이 바라보는 예수 (46쪽)이다.

보통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그늘진 곳을 보는 이가 바로 정의와 평화에의 예민성을 체현해 낼 수 있는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열한 살의 소년 홍순관의 시선은 교회 강단에서 설교하는 권위가 주어진 중심부에 있는 이가 아니라, 오로지 걸레질할 때에만 강단에 올라갈 자격이 주어지는 청소하는 사찰집사의 부인을 향한다 (6쪽). 교회를 포함해서 다양한 제도들의 개혁을 이야기하는 이들은 많지만, 정작 어떠한 종류의 개혁이며 무엇을 위한 개혁인가에 대하여는 별로 설득력 있는 제안을 만나기 어려운 이 시대에, 이렇게 그늘진 곳, 주변부에 있는 이들을 생각하며 제시하는 개혁이야말로 진정한 정의로운 개혁이 아닌가. 교회의 사찰보다도 더 낮은 곳에 있는 사찰집사의 부인—‘사찰집사’라는 공식적 직함조차 주어지지 않은 ‘비존재’로서 살아가는 이 사찰집사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뭉클해 지지 않을 수 없다. 개혁의 꿈을 지닌 이들은 이렇게 그늘진 곳들을 보면서 그 개혁의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여야 하는 것임을 홍순관의 시선은 전한다.


3. 연민의 시선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연민과 연대가 부재할 때, 종교는 신의 이름으로 그 자체의 권력 확장과 유지에 연연한 제도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쌀 한 톨에도 천지의 노래가 들어있고, 아이의 웃음소리에 우주가 진동 (7쪽)”하는 것을 느끼는 그 시선은 사실상 종교의 가장 근원적인 그리고 인류의 생존에 가장 필요조건인 연민의 시선이다. 연민(compassion)이란 ‘함께 고통함 (suffer-with)’을 의미한다. 우리 각자가 만약 쌀 한 톨 에서 천지의 노래를 듣는 섬세한 마음을 지닐 수 있다면(111쪽 ), 그리고 한 아이의 웃음소리 속에서 우주가 진동하는 것을 느끼는 그 깊은 마음이 있다면, 평화의 세계를 만드는데 요청되는 그 연민의 시선을 체현하는 이들이 될 것이다. 쌀 한톨이나 아이의 웃음소리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은, 보이는 업적과 개인의 이득이 ‘공공의 선’보다 언제나 우선하는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종교를 끄집어내는 힘을 지니고 있는 이들이다.

기복신앙의 예식으로서의 기도는 지극히 이기적인 예식이 되어버렸다. 자식의 성공을 위해서, 입시를 위해서, 사업을 위해서,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하는 기도들에는 정작 예수 믿음의 가장 중요한 가치들이 부재하다. 그러한 자본주의화 된 이기적 기도들에는 타자의 아픔도, 전쟁과 폭력의 시대에 대한 고뇌도, 지금보다 더 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도 들어가 있지 않다. 홍순관은 이러한 기복신앙의 예식이 되어버린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의 기도에는 지구와 우주가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분리되지 않고, 가족과 이웃, 교회와 세상이 따로 분리되지 않으며, 지구의 이편과 저편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지극한 연민을 품고 (123 쪽)” 기도할 뿐이다. 기도는 이 세상과 타자들에 대한 연민을 품어내고, 자기를 돌아보는 신과의 대화의 시간이며 비판적인 자기 성찰의 예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홍순관은 절절하게 외친다.


4. 종교의 진리가 아닌 생명사랑의 진리

종교와 세계를 성과 속의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 근대의 산물이다. 성서는 신이 이 세계를 사랑하므로 인간 속으로 들어왔다고 전한다. 즉 신의 성육사건은 ‘성과 속’이라는 이분법적 사유의 세계를 홀연히 넘어서는 사건인 것이다. 성과 속의 경계를 넘어서서 종교적 교리 자체가 진리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사랑’이 바로 진리이다. 그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할 진리의 경험을 홍순관은 “님의 세계에 산다는 것은 새의 날개처럼 자유로운 것 (12쪽)”이라고 전한다. ‘종교’가 아니라 ‘생명사랑’이 바로 예수의 ‘진리’임을 홍순관은 자신의 노래를 통해서 이 세계에 선포하는 것이다. “천국의 자유가 춤추 (17쪽)” 는 것을 온 존재로 느끼고 노래하는 이들-- 그들이 바로 진정한 종교인이다. 그러한 종교속의 신은 이 땅을 살아가는 생명들과 상관없이 역사 저편에서 저 멀리에 있는 전적 타자로서의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우리의 “님 (12쪽)”이며, 땀 흘리며 일하는 농부와 (17쪽) 함께 땀 흘리는 존재이다. 또한 그 신은 그 어떠한 근거에서도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끌어안고 포용하는 ‘태양’과 같은 존재이다 (18쪽). 홍순관이 노래하는 신은 더이상 가부장제적인 신이 아니며, 전쟁에서 승리하는 정복적인 왕과 같은 신이 아니다. 홍순관의 신은 우리와 함께 춤추고 (19쪽), 큰 바다와 같이 우리를 끌어안고 (25쪽),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우리와 함께 기뻐하는 포용과 연민의 신, 바로 생명사랑의 진리의 현현으로서의 신이다.


5. 탈권력의 종교

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종류의 권력을 지니게 되면, 그 권력의 확장과 유지를 지상의 과제로 삼고 있다. 점점 커지는 교회건물, 교인 수를 늘이기 위한 전문적인 인력관리, 목회자들의 재정적 집착과 욕구는 모두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권력종교의 모습이다. 홍순관은 이러한 권력종교를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종교의 탈권력화를 노래한다. “냇물이 높은 곳으로 가는 일은 없다 (23쪽)”며 “냇물과 같은 예수의 길 (24쪽)”을 따라야 한다고 외친다. 예수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한 그 심오한 의미가 교리화된 틀 속에서 그만 상실된다. 예수가 따르라고 한 길은 사실상 단순한 ‘종교의 길’이 아니라 소외되고 아픈 이들과 함께하는 길이라는 것을 홍순관은 상기시킨다. 윤동주의 십자가 (33쪽), 산 밑의 예수(44쪽), 고립된 낮은 곳의 예수는 냄새나는 일상, 즉 추함, 가난함, 소외가 엉클어진 일상의 세계 바로 그곳에 서 있는 예수 (46쪽)이다. 현대의 교회들이 이러한 예수를 따르고자 한다면, 모든 종류의 권력들을 단호히 내려놓는 탈권력화를 지향하고자 하는 결단을 해야 할 것이다.


6. 생명사랑으로서의 종교

홍순관은 종교의 본질이란 바로 생명사랑에 있음을 절절히 노래한다. 무수한 “어이없는 죽음들,” 기술문명과 발전의 이름으로 무수하게 죽어가는 생명들에 대하여 아파하는 그는, “꽃에 바람이 불어도 그 향기 없고, 들판에 무명초는 춤추지 않는다(39 쪽)”고 아파한다. 남의 것을 탐내지 않고, 그 자리에 서서 그늘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안식과 휴식을 주는 평화의 공간을 마련하는 나무(22쪽)를 바라보는 그는, 진정한 평화란 다양한 모습의 생명들에 대한 지순한 사랑이 지닐 때에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종교란 결국 이러한 생명사랑의 공동체이며, 예수를 따르는 삶이란 구체적인 생명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 삶임을 홍순관은 상기시키고 있다.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누구나 우러러보는 산꼭대기가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인 ‘산 밑에서’ 살겠다고 (44쪽) 다짐하는 그는, 종교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 예수를 따른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그의 절절한 노래로 제시한다. 평화를 향한 삶은 우리의 일상적 삶에서 육화되어야 한다. 즉 평화 자체가 그 목적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사랑에의 열정, 헌신, 그리고 실천에서 비로소 평화가 공기처럼 스며드는 것이다. 간혹 평화가 아닌 “평화에 대한 일” 자체가 주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홍순관은 지적한다 (130쪽). 평화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평화를 살아가는 것, 즉 생명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살아내는 것—그 길에 자연스럽게 평화가 있는 것이다.

배부르고 성공하고 편하게 지내는 사람보다 “죽어가는 사람, 자살 직전의 사람, 사업 망한 사람 (136쪽) ”에게 들리는 노래란 어떤 노래일까. 생명이의 소중함에 대한 절절함, 가식 없는 진정한 가슴속의 노래, 이러한 노래야말로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에게 절절하게 다가가는 노래일 것이다. 건강한 사람은 의원이 필요 없고 아픈 사람에게 의원이 필요하다고 한 예수의 말처럼, 홍순관의 노래는 실패하고 아픈 이들에게 다가간다. 새로운 희망과 삶의 에너지를 가지고 그 아프고 실패한 사람들의 손을 가만히 따스하게 잡아주는 희망과 진정한 치유의 노래로 다가가는 것이다.

신학의 부재, 철학의 부재, 그리고 상투성과 경박성이 난무하는 노래들이 ‘복음성가’라는 이름으로 기독교인들로부터 사유와 고민하는 공간들을 박탈하고 있다. 그 복음성가의 가사들은 복음의 지나친 단순화를 반복하면서 사유하는 종교인들을 배제시킨다. 교회들에서 불려지는 찬송가나 복음성가들의 가사들은,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일들과 아무런 연계를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의, 평등, 평화와 같은 예수에게 중요한 가치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일상생활 속에서 고통과 슬픔을 경험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나,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개입이 부재한 가사들을 지닌 노래들이 설사 ‘성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해도, 그것이 ‘거룩성’을 지닌 성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홍순관의 노랫말이 담고 있는 신학은, 이러한 복음의 상투화와 단순화 그리고 왜곡화에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부언할 필요없이, 진정한 노래하기란 단순한 기술이 아니다. 노래는 노래를 부르는 이의 정신과 영혼과 몸이 혼연일체가 되어 나올 때, 비로소 듣는 이에게 가슴이 출렁하고 움직여지는 진정한 감동을 전한다. 노랫말이 담긴 정신과 철학을 체현하는 노래는 그 노래를 듣는 이들을 단지 즐겁고 흥겹게만 하지 않는다. 그러한 노래들은 깊은 사유의 세계로 초대하는 힘을 지닌다. 나는 홍순관의 노래와 그 노래에 담긴 시들에 나, 타자,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생각하게 하는 철학이 있다고 느낀다. 그러한 사유의 세계로의 초대를 통해서 자본주의화 된 이기적 종교로부터 벗어나서 생명사랑과 평화를 이루는 여정에 서 있는 진정한 종교의 모습을 조금씩 찾아 나가게 되지 않을까.


미국 텍사스크리스천대 브라이트신학대학원 강남순 교수